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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사 51:17-23) 2019-11-30 12:54:16
작성자 : 온 유   조회 232, 추천 69


2019. 12. 01.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이사야 51 : 17-23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잠들어 있는 분 계십니까? 한 젊은이가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고민을 하다가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깊은 잠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중에 가족들이 발견하고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싣고 갔습니다. 그 사람의 위를 깨끗이 세척했는데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담당의사는 가족들에게 “자극을 주어 눈을 뜨도록 하십시오. 계속 잠만 자고 있으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깊은 잠에 취하면 의식 있는 사람도 깨우기가 힘든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그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계속 자극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의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깊은 잠에서 곧 사망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다윗은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13:3)라 하였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좋았던 다윗도 사망의 잠을 아주 무서워했다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사망의 잠이 무엇입니까? 죽음이 아닙니까? 사망을 무서운 폭군이라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열 처녀 비유가운데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라 하였습니다. 마지막 때 교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을 더 사랑하시며 은혜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립시다.

     교회력 가운데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초림 하셨을 때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여 아쉬웠는데 재림 하실 땐 그렇지 않도록 깨어있기로 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절 4주 앞두고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기간으로 보아야 옳습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이들도 더 경각심 가진다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혹시 사명의 깊은 잠을 자고 계십니까? 마귀가 지금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안타까이 여기며 깨어 일어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을 깨우던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이사야였습니다. 무서운 재앙이 오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예루살렘조차 엉망이 되어 버림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을 시온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보면서 깨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옛날에 비해 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성령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부흥사들이 많아서 정신을 자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하여 놀라운 은혜를 이 강산에 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어떻게 하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노의 잔을 마신 자도 이제 정신 차려야 합니다.      

     17절에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라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분노의 잔을 마신 후 혼미한 상태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라면 당연히 축복의 잔을 마셔야 옳습니다.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있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히 구별 받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어쩌다 분노의 잔 곧 저주의 잔을 마시게 된 것입니까? 그 사연은 열왕기나 역대기에 비교적 소상히 밝혔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 섬기는 일을 용납지 않으셨는데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좋은 대로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면 왜 고루하게 그러느냐며 비웃습니다. 옛날 예루살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참으시다가 결국 분노의 잔을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망가뜨렸습니다. 그들의 국보 1호 같았던 성전까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일찍 깨닫고 정신 차리므로 은혜들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비틀거리다 쓰러지므로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17절 중간에 “네가 이미 비틀걸음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비웠도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큰 잔을 마셨으므로 비틀거리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주 큰일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언젠가 지하철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취한 사람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전한 곳에 있어야 옳지 않습니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술을 깼어야 옳았습니다. 자기가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큰소리를 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결국 선로를 향하여 몸을 던졌습니다. 전동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큰 사고가 난 것입니다. 죽음이었습니다. 요즈음 여자들도 술을 좋아해서 사고를 많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40대 여자가 만취해서 자동차 달리는 도로로 뛰어들어 사고가 났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쾌락에 젖어 타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 방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시 신앙적으로 비틀거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모습 보시며 깨우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취한 사람처럼 신앙적으로 비틀거리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인도자를 보내셨으므로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18절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네가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을 너를 이끌 자가 없도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예루살렘을 바르게 세울 자 있는지 찾았는데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셨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부하는데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하셨고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셨던 것입니다. 양떼들이 죽음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 양들을 구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목숨 내놓고 양들을 구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유능한 인도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양들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그리스도인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인도자를 따라 더 신앙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정신 차림은 전설처럼 알려졌습니다. 그는 15세 때 화랑이 되었습니다.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천관이라는 기생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기방 곧 술집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호되게 꾸지람을 하였습니다. 김유신은 깊이 반성하고 바르게살기로 하였습니다. 한 번은 술을 마시고 말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 기방으로 데려간 것입니다. 김유신은 정신을 차린 후 그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결단이 훗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날 정신 차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루살렘도 큰 잔을 마신 후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어 깨우셨던 것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한 때 방탕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펴들었는데 로마서 13장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사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를 보며 정신 차렸다고 했습니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잘못된 일에 빠져들어 마치 취한 자처럼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말 위에다 소망을 두었다면 깨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억울함 풀어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22절에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시는 이유는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예루살렘의 억울함을 모두 다 알고 계셨습니다.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거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일도 보셨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무너지는 광경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모습도 보셨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언젠가 그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랬기에 만신창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전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회개하고 돌아서야 옳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러 번 경고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좀 일찍 정신 차렸더라면 그 억울함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고의 말씀 주실 때 더욱 더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물에 걸린 영양 같아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20절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물에 걸린 양들처럼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발버둥을 쳤겠습니까? 그러나 그 그물은 쉽게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운만 소진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탈진이었습니다. 일어날 힘도 없었습니다. 그냥 거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물이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바벨론 그물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주 강한 자 곧 바벨론보다 더 막강한 자가 그 그물을 치워주어야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서시기로 하셨습니다. 전에도 이런 역사를 많이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급의 노예로 있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바로의 그물에 걸려있는 양들과 같았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쏟으시니 그물이 벗겨졌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후 여러 번 그물에 걸렸었습니다. 사사를 보내시어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물에 걸렸을지라도 하나님 은혜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곤고한 일이 아주 많아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21절 “그러므로 너 곤고하여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지는 않았으나 그와 같은 상태라면 귀담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비슷한 사례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나라는 여인이 그랬습니다. 자식이 없었습니다. 불행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곤고히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할 것 같아 다른 여인을 남편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그 여인과 그 여인의 자식들이 구박을 했습니다.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왜 자신은 이렇게 불행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실로에 성막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들어진 성막이 아닙니까? 가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실로에 가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을 하나님 앞에 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치 포도주에 취한 여인처럼 보였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지적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들으시고 그 한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하나님 만난 후 억울함을 풀어야 하겠습니다.

  르네상스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언제 거인이 되었는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언제 거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불레셋의 거인 골리았을 쓰러뜨렸을 때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거인이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을 통일시키고 왕국 건설에 성공했을 때가 맞습니까? 그것도 아니라 하였습니다. 도대체 다윗은 언제 그처럼 거인이 된 것입니까? 다윗만큼 억울함을 많이 당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큰 잘못도 없었는데 사울 왕이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어디 사울 왕만 죽이려 했습니까? 불레셋은 물론 주변의 강대국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 압살롬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항상 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거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디 다윗뿐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서 억울함도 풀어야 하겠습니다.

  괴롭게 하던 대적들의 엎드러짐을 믿어야 합니다.    

      22절 중간에 “보라 내가 비틀 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받았던 패망을 대적들이 받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패망 곧 고통을 잔으로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처럼 바벨론도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은 정말 영광스러웠습니다. 많은 국가들이 부러워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도 왕국 옥상에 올라가 큰 도시를 돌아보며 감탄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오래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 강대국이 어찌 그리 쉽게 패망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마시던 잔을 그들에게 마시도록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 바벨론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통을 잔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전면에 나섰지만 그 뒤에 마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잔을 대적들이 마시도록 하십니다. 로마제국도 망했습니다. 마지막 잔을 마시고 쓰러질 대상은 마귀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신앙으로 깨어서 하나님께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더 굳건하게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대적의 허리가 땅과 같게 되므로 믿는 것입니다. 23절 중간에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허리 굽히도록 한 그들이 오히려 허리 굽히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분노의 잔을 마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깨우셨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영광을 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과거처럼 활기가 넘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원래 여부스 족속이 살던 산지가 아니었습니까? 다윗이 예루살렘이라 이름을 바꾸고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번영할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 영광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다시는 그런 영광이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면 얼마든지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깨는 일입니다. 옛날 다윗과 그의 사람들처럼 정신 차리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결국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므로 허리를 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무릎 꿇게 되므로 믿는 것입니다. 23절 중간에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밟고 다녔던 대적들을 엎드러지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짓밟혀야 했습니다. 그 모욕감이 얼마나 했겠습니까? 짐승보다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름더미 속에 있는 사람들도 높이실 수 있으십니다. 존 번연은 교회를 ‘아름다운 궁전’이라 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농가의 헛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농가의 헛간을 아름다운 궁전이라 하였으니 놀라운 일 아닙니까? 도대체 헛간 같은 예배당을 어찌 아름다운 궁전이라 하였겠습니까? 그는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나무 의자에 앉아 예배당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치는데 너무 아름다워 궁전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았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계21:1-2)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초라한 교회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니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생활 진력하므로 영광스러움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깨우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깨우고 계십니다. 인류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처럼 혼미한 교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먼저 분노의 잔을 마신 자도 이제 정신 차려야 합니다. 비틀거리다 쓰러지므로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인도자를 보내셨으므로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억울함 풀어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물에 걸린 영양 같아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곤고한 일이 아주 많아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서 억울함도 풀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괴롭게 하던 대적들의 엎드러짐을 믿어야 합니다. 대적의 허리가 땅과 같게 되므로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길에서 무릎 꿇게 되므로 믿는 것입니다. 경건생활 진력하므로 영광스러움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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