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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눅 12 : 51-59) 19. 12. 08. 2019-12-07 10:12:35
작성자 : 온 유   조회 236, 추천 54


2019. 12. 08.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누가 12 : 51-59    

     하나님의 은혜는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하였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아마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제대로 깨달아 신앙으로 사는지 보고 계실 것입니다. 니느웨란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수르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던 도시입니다.(욘1:2)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 선지자가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치니까 모두 회개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니느웨를 무너뜨리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그 악독한 사람들이 철저히 회개했다는 사실이 이해 가십니까? 그러나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바다에 던져 진 요나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서 어떤 일 있었는지 소문나 있었습니다. 광풍이 불어 요나를 바다에 던져진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요나가 살아와 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들어 ‘요나의 표적’을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최근에 기이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포항과 영덕에 지진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종말을 설명하시면서 지진과 다른 징조들도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징조를 통하여 깨달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립시다.  

     재림에 대한 내용을 설교하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너무 살기가 좋아져서 그렇습니다. 옛날 한국 전쟁 이후에는 너무 힘들었기에 재림 설교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교회마다 부흥회를 자주 열었는데 부흥사들이 낮 공부 때 많이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재림에 대해 아주 심각하게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베드로와 요한도 재림을 강조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서신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물론입니다. 어떤 설교를 할까 묵상하다가 재림이 떠올랐습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거의 없었습니다. 새벽에 닭이 울면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예루살렘을 깨우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강단에서 닭의 울음소리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베드로처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앞부분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부자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사람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다 차지했는데 좀 나누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보다 영혼이 더 귀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며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라” 하셨습니다. 재림에 대한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본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 해야 하는지 그 답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구하기보다 구원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51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곧 구원자 이해를 새롭게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메시아 관은 화평 곧 평안이었습니다. 다윗보다 위대한 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메시아 곧 왕은 그들에게 평안을 줄 줄로 알았습니다. 과거 선지자들이 평화에 대해 예언들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11:1-2) 하였고,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너을 것이라.”(사11:6-8) 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평화로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불을 던지리라.” 하셨습니다. 구원사업 이후 평안을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더욱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항상 신앙생활 올바로 하는 쪽에 서는 것입니다. 52절에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과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족들이 나눠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나 부모와 자녀 사이는 하나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가 되지 않아서 갈라서는 가정도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큰 일 앞에서는 더욱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리고 복음 때문에 나눠질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런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남편의 종교와 아내의 종교가 달라 갈등하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남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가르침을 따라가고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가니 문제가 파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 곧 하나님 아들로 믿는 쪽을 택해야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핍박이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핍박해도 예수님 믿고 굳게 서는 것입니다. 53절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지와 분쟁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분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들이나 딸 그리고 며느리 입장에서는 핍박 받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런데 가정 밖에서는 어떻겠습니까? 특별히 직장 상사와 갈등을 겪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신앙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약 포기하면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다행이 하나님께서는 핍박 받는 자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환란 속에서 살아난다면 놀라운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12)라 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박해 받아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바울’ 이란 영화를 보면서 로마의 카타콤이 생각났습니다. 영화에서 바울이 갇혔던 감옥이 마치 지하 동굴과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성지순례 코스가 좋았습니다. 이집트 카이로를 먼저 들려 파라오의 유물 박물관 그리고 피라미드 스핑크스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이스라엘을 둘러 본 후 기독교 꽃 피웠던 로마를 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카타콤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땅속으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하에 생각보다 길이 많아서 안내원의 인도가 아니면 길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소녀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발굴할 때 모습을 그대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겠습니까? 신앙을 포기하면 좋은 남자 만나 가정 이룰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로 하였습니다. 순교를 당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모습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귀한 생명의 면류관을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므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종말이 오니 시대 분별한 후 정신 차려야 합니다.    

     54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징조를 보고 그에 대비를 하듯 신앙적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계획표가 들어 있습니다. 그 계획표를 시간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심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되어 진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할 때 아주 지루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시기 위해 아브라함이 선택되었습니다. 보내시는 장소는 지중해 곧 지구의 중앙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을 여럿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지루했기에 사람들은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쪽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징조가 나타나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아니 실제로 오셔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도 믿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렸어야 옳았습니다. 마지막 때에도 그렇습니다. 어느 때보다 징조가 더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징조가 나타나니 더욱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천기에 대처하듯이 신앙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56절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하셨기 때문입니다. 대자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적응하듯이 하나님의 징조를 보면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다의 영양입니다. 소나기가 오려면 구름이 서해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중해가 있습니다. 그 바다에서 비를 만들어 옮겨오고 있습니다.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이 있습니다. 보통 때의 바람이 아닙니다. 맞바람이라 하지 않습니까? 또 그들에게는 가끔씩 남풍이 불었습니다. 뜨거운 바람을 몰고 왔던 것입니다. 지금이야 기상 관측소가 있어 그날 하루는 물론 거의 일주일의 기상까지 예보하고 있어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하늘을 보고 바람을 보며 예측하고 적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놀라운 징조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징조에 적응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도 그와 같다며 징조를 예고하신 것입니다. 말세의 징조를 보며 더욱 신앙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매사에 스스로 옳고 그름 잘 판단하는 것입니다. 57절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옳은 쪽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판단능력이 없었습니다. 모든 판단을 서기관들에게 맡기기도 하였고 바리새인들에게 맡기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바라보고 따라갔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들을 찾아가 답을 찾았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랍비가 되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광경을 보셨습니다.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이끌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잘 모르면서 사람들을 이끌어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그들도 소경이었습니다, 가장 옳은 것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을 너무 믿지 말고 스스로 판단력을 키우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옳음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생명의 말씀임을 알았어야 옳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들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분별하여 처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능력 스스로 키워서 유혹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여자 대학생 하나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교회학교 아동부와 중고등부를 거쳤습니다. 신앙이 누구보다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몇 사람이 카페를 찾았습니다. 그들 주변에서 엿들으니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천사들과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갔습니다. 그들은 그런 그녀에게 성경공부를 하고 싶으면 오라며 인쇄지 한 장을 주었습니다. 마치 천사들과 같아서 시간을 내어 찾아갔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빌딩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S 종교 훈련원이었습니다. 여러 번 이단이라고 들었으나 설마 하며 참여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분별력을 키웠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나중에 보니 세뇌당하여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그런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도 나타난다 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말세의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마귀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교역자 모르게 교회 밖을 서성이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천사로 가장하기에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몰라보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징조와 진리를 분별한 후 올바르게 대처해야 하겠습니다.

  다툼이 있으면 곧바로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58절 중간에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 재판까지 가서야 되겠습니까? 법정 싸움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예인 하나는 아주 여러 번 법정 싸움을 한다고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 앞에서 받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생 판결을 내리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먼저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 무시하면서 좋은 판결을 기대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구원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영생 판결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화해를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과 대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승산 없는 싸움을 하나님과 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심판대에 서는데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통하여 화해 이루고 심판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상대가 고소하지 아니하도록 해결하는 것입니다. 58절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화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알고 보면 세상에서의 삶이 심판자 앞에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사회에서 이해관계에 얽힐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다른 공동체보다 화해를 이루어야 하는데 다툼이 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원수가 없을 정도로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며 싸우다가 이기고 싶어서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 말을 들으면 옳습니다. 그냥 지면서 살면 너무 억울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억울하지만 심판자 하나님이 아시니 차라리 지는 게 났다고 하십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억울하여 하나님께 호소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이 하나님께 호소하기 전 화해를 이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사람을 미워하면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미움과 다툼을 일으켜서 심판자에게 벌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화해를 이루므로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처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와 원수로 지내며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배도 예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에 문제가 있었음을 선지자의 경고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에 천을 곱한 제물 그리고 만에 만을 곱한 기름 원하시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수십 년의 신앙생활을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다고 하나님의 사람이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옛날에 사울 왕도 그랬었습니다. 오히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올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해를 기뻐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손익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해 이루므로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 올려야 하겠습니다.

     오직 신앙으로 살면 답답하게 보이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위대한 신앙인들도 그랬습니다. 그 결과는 나타날 것입니다. 답답하게 보이면 어떻습니까? 지금 무엇을 할지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평안을 구하기보다 구원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항상 신앙생활 올바로 하는 쪽에 서는 것입니다. 누가 핍박해도 예수님 믿고 굳게 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 하므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종말이 오니 시대 분별한 후 정신 차려야 합니다. 천기에 대처하듯이 신앙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스스로 옳고 그름 잘 판단하는 것입니다. 징조와 진리를 분별한 후 올바르게 대처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툼이 있으면 곧바로 화해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상대가 고소하지 아니하도록 해결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처신하는 것입니다. 화해 이루므로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 올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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